국내 유일 장르 경쟁 단편영화제인 미쟝센단편영화제 수상작들을 넷플릭스가 제공하고 있더라구요.
오래전 영화지만 요즘 핫한 구교환, 김꽃비 주연의 <4학년 보경이>를 선택하고 플레이를 눌렀습니다.
화려한 수상 내역만 봐도 알 수 있듯, 평단과 관객 모두를 사로잡은 수작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지 한번 볼까요?

1. 기본정보
- 제목 : 4학년 보경이(A Dangerous Woman, 2014)
- 감독 : 이옥섭
- 출연 : 김꽃비(보경 역), 구교환(덕우 역), 백수장(선배 역)
- 장르 : 드라마, 로맨스, 블랙코미디
- 러닝타임 : 28분
- 관람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수상내역 : 제13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베스트 오브 무빙 셀프 포트레이트
2. 간략줄거리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교 4학년 보경(김꽃비)은 허름한 작업실에서 남자친구 덕우(구교환)와 동거 중입니다.
길에 버려진 소파를 보고 쓸만한지 체크한 보경은 덕우를 불러 함께 소파를 낑낑대며 작업실로 옮겼고, 덕우는 그 소파위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덕우와의 연애가 질리고 단조로웠던 보경은 작업실에 있는 대문 그림을 보다가 문득 예전 선배(백수장)와의 묘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권태로운 연애에 지쳐가던 그녀에게 새로운 설렘이 틈입한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흔들린 보경은 덕우에게 헤어지자 말하고, 두 사람은 이별 의식처럼 마지막 관계를 갖습니다.
이때 덕우는 더 큰 쾌락을 위해 목을 졸라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하고, 보경은 그의 목을 조르며 관계를 이어갑니다. 그러다 덕우가 실신해버리는데 덕우를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꿈쩍도 안하고 죽은 듯 있습니다.
보경은 자신이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서 썩게 될 거라 상상하며 패닉에 빠집니다. 그리고 본능에 이끌려 택시를 타고 선배의 집으로 도망칩니다. 선배에게 이제 나를 더 볼 수 없을 것이라며,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선배와 관계를 갖습니다.
모든 걸 체념하고 작업실로 돌아온 보경은 죽은 줄 알았던 덕우가 보이지 않자 화들짝 놀라며 덕우를 찾습니다.
덕우는 장난스럽게 숨어있다가 보경을 놀래킵니다. 죽은줄만 알았던 덕우가 깨어있는 것을 본 그녀는 안도감도 잠시, 선배와 관계를 하고 온 사실을 덕우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이 말을 들은 덕우는 왜 나를 이렇게 대하냐며 무너집니다. 그녀의 작업실 물건들을 기괴하게 세로로 세워두고는 "잘 먹었습니다"라는 알 수 없는 의미의 인사를 남긴채 보경의 작업실에서 나갑니다.

3. 관람포인트
찌질함마저 연기가 되는 구교환&김꽃비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특히 구교환 배우는 자칫 비호감으로 보일 수 있는 덕우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특유의 가늘고 없어보이는 목소리로 내뱉는 찌질하고 궁상맞고 순진무구한 대사들 속에, 없는 자지만 나름의 확고한 철학이 있는 듯한 무게감을 싣는 능력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가벼운 연기에 최적화된 듯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의 연기는 이 영화의 볼거리입니다. 김꽃비 배우 역시 황당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는 보경의 내면을 밀도 있게 잡아주며 극의 중심을 이끌어갑니다.
발칙하고 유쾌한 19금 언어 유희
이옥섭 감독 특유의 재기발랄한 대사 센스가 빛을 발하는 영화입니다. 문 그림의 제목을 '들어오세요'라고 하거나 미싱 기계를 보며 '박아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들은 일상적인 단어를 순식간에 에로틱한 은유로 비틀어버립니다.
특히 덕우가 떠나며 남긴 마지막 인사 "잘 먹었습니다"는 식사 인사이면서 동시에 그동안 둘의 성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중의적 표현으로, 관객에게 묘한 웃음과 므흣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런 아슬아슬한 언어 유희를 부담스럽지 않고 유쾌하게 풀어낸 연출력이 돋보입니다.
미스터리한 엔딩 : 그는 왜 물건을 세로로 세웠을까?
영화의 마지막, 덕우는 보경의 작업실을 떠나기 전 작업실의 물건들을 세로로 세워두고 나갑니다. 소파, 서랍장, 의자, 도구상자 등 반듯이 있는 것들을 반대로 두고 떠납니다.
보경과의 관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싶었던 것의 표현인지, 보경의 익숙한 세상을 헝클어놓고 싶은 소심한 복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이 알 수 없는 행동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것도 이 영화를 보는 큰 재미였습니다.

4. 총평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과의 관계는 식어가고, 새로운 사람이 계속 눈과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대부분은 갈등하고 숨기려 하겠지만, 영화 속 보경은 양다리를 걸치기보다 차라리 잔인할 만큼의 솔직함을 택합니다.
그것도 무미건조하고 아주 담백하게 말이죠.
영화 <4학년 보경이>는 찌질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청춘들의 자화상을 유쾌하게 그려냅니다. 덕우의 마지막 인사처럼 씁쓸하지만 어딘가 후련하기도 한, 이옥섭 감독만의 독특한 맛이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권태로운 연애에 지쳤거나 뻔하지 않은 로맨스 영화를 찾는 분들에게 이 발칙한 28분의 이야기를 추천합니다.